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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30 그랜 토리노 - No one can forgive my sin except me. 2
Telling you.../About Movies2009. 3. 30. 21:57

인간에게 종교가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끔 하다보면,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책임전가와 속죄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잘못은 악마나 다른 나쁜 존재가 저지를 일이고 나는 참회하고 있으니 나의 마음의 짐을 벗겨달라는 시위의 일종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죄를 짓고 속죄하고 또 짓는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주말마다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교회에 가서 속죄기도를 하고, 사찰에 가서 절을 수백번 하고도 다시 죄를 짓는 인간들이다. 이런 범인과는 달리 속죄를 신에게서 찾지 않는 월트라는 고집불통에다 불독같은 노인네가 있다.

< 그랜 토리노 >

* 스포 있음 *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배우로서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을 하고 주연이자 연출을 맡은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그의 유서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묵직함을 가지고 있다. 묵직함에 해학과 사회적 메시지까지 더해진 수작이라고 평하고 싶다.

우선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월트 코왈스키라는 인물을 살펴보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인종 차별적이며 보수적인 면으로 가득차 있다. 한 가지 차이라면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 정도랄까? 월트는 폴란드계 미국인이다. 결국 그 자신도 순종 미국인은 아니면서도 아시아계, 흑인들을 증오한다. 아시아계를 싫어하는 것은 그가 한국전에 참전해 저지른 죄에 대한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이태리 이발사에게도 인종 차별적 농담을 스스럼없이 건낼만큼 그는 뼈속까지 인종차별 주의자인 것.

이런 월트의 변화는 결국 미국 사회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보수주의적 성향의 미국인들은 어쩔수 없이 유색인종들과 어울릴수 밖에 없다, 처음 단지 그의 재산과 땅을 지키려던 월트가 변하는 것처럼, 결국 함께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보면 보수주의적 성향을 띄던 그가 그들 사이로 뛰어들게 된 계기를 만드는 것도 결국 유색인종간의 갈등이다. 수와 흑인 건달들의 갈등말이다. 또,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백인이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 거부하는 것처럼, 결국 섞여서 어울려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은 현재 미국의 상태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마지막으로 그랜 토리노는 과거이자 동시에 미래를 상징한다. 72년 본인이 포드에서 일할때 직접 조립한 차로 자신의 자부심이자 미국의 자존심인 그랜 토리노를 동양인 소년에게 유산으로 남겨주는 그의 선택은 융합과 조화라는 미국 사회의 새로운 화두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자, 이제 포스터를 보자. 뭐가 보이는가? 손에 든 저 총과 뒤에 배경이 된 그랜 토리노. 저 포스터가 영화에 대해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이제 개인적 측면에서의 월트를 살펴보면, 월트는 전통적 종교를 거부한다. 그의 아내는 카톨릭 신자였고, 그래서 아내의 장례식도 교회에서 치렀지만, 그는 종교가 사람을 구원할수 없다고 믿는다. 아내는 신부에게 그를 참회하게 만들고 마음의 짐을 덜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결국 그는 그의 방식대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월트는 52년 한국전에서 소년을 살해한 것으로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점점 더 삐뚤어진 삶을 살고 있는 중에 동네에 미국인들이 이사가버리고, 이제 동네에 혼자 남은 미국인이 된 그의 옆집에는 타오와 수가 사는 집이 있다. 동양인들을 보며 그 죄책감을 다시 떠 올리던 그에게 타오와 그의 가족은 눈엣 가시와 같았을 것. 그가 타오의 잘못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던 그들과 다시 엮이게 되면서 점점 그의 심경에는 변화가 생긴다. 타오의 집의 셔먼에게 한번에 읽혀버린 그가 그만의 틱틱거리는 방식으로 그들과 어울리게 되며, 그의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주려 하지만 망쳐버리고 만다. 그 책임감으로 월트는 40년 넘게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스스로에 대한 구원을 타오에게 안전한 길을 열어주면서 얻는다. 그만의 방식으로.

월트의 마지막 선택은 복수지만 복수가 아닌 희생으로 타오의 길을 열어주는 선택이자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다. 자신이 50년전에 망쳐버린 한국의 한 꼬마의 미래대신 타오의 미래를 위해서.



영화적 측면에서 볼때, 이 영화는 표현면과 노출의 기술에서도 돋보인다. 잔잔하면서 효과적 카메라의 이용이 돋보임. 특히 첫 장례식장면 5분으로 가족간의 갈등과 신부와의 관계등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낸다. 또, 영화 내내 자연스러운 웃음을 연출해내면서도 긴장을 놓치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묵직한 펀치를 날린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영화의 무게를 잘 조절하는 기술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내공을 다시 느끼게 한다.

첫장면의 장례식과 마지막 장면의 장례식의 수미쌍관식 구성과 마지막 도로에서의 롱샷으로의 엔딩은 긴 여운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장면은 수가 폭행당하고 돌아온 후 집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장면에서 그는 결심을 마쳤다. 조금전까지의 감정의 폭발을 가라앉힌 그는 자신의 구원과 복수를 완성하기 위한 스스로의 장례식을 찬찬히 준비한다. 이 과정이 유쾌하면서도 무게감있게 그려진다. 이태리 이발사에게는 틱틱 거리며 팁을 더 주고, 자기를 싫어하는 몽족 할머니에게는 나도 사랑한다는 농을 던지며 자신의 아내와도 같은 데이지를 맡긴다. 처음 맞춰본다는 양복은 그의 장례식을 위한 것이다. 타오를 집안에 가두면서 그에게 달아준 그의 훈장. 이런 장면들을 표현하는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약간, 아쉬운 부분은 그의 건강상에 대한 이슈는 단지 그가 약해졌다는 부분의 표현만으로 그쳐서 미결의 문제로 흐지부지 되어버린 것과 자신의 가족과의 갈등도 흐지부지 된 것같아 조금 아쉽달까?




그랜 토리노는 재미있다. 단순하게 재미있는 수준을 넘어서 구원과 화해에 상생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무게를 잡으며 관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묘사하고, 역설적 음악을 쓰고, 재치있는 대사와 적절한 생략과 절제된 표현으로 이 무거울수 있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고 누가 이런 역할을 잘 소화할수 있을까? 그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틱틱거리며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투박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그 말고 누가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랜 토리노를 타고 해변가를 데이지와 함께 달리는 타오. 그 차가 떠난 뒤의 도로를 끝까지 잡고 있는 카메라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올해 한국 나이로 여든이 되셨다는 클린트 할아버지. live long and prosper. (표절)



Posted by 파라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