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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09 What do you expect? - The Road 2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멸망이라는 테마는 영화계에서 쓰기 쉬운 소재이고 실제로 많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The Road 도 좀 뻔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작자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쓴 코맥 맥카시인데다가 주연인 비고 모텐슨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종말을 다룬 영화와 어떻게 다를지 더 기대대되는 영화기도 했다.

< The Road >



* 약 스포 있음 *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안에 불이 들어올때까지 엔딩 크레딧을 보는 사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준비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주먹으로 가슴을 얻어 맞은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종말을 다룬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재난이나 종말을 다룬 영화들이 주인공의 영웅적 행동으로 재난에서부터 살아남는 모험담 위주로 흘러간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다닌다. 단 하나의 목적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 뿐. 그런데 이 영화는 이 목적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보통 종말을 다룬 영화들은 상황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상황에 상당부분을 기대어 시작한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종말의 모습을 이용하여 공포심으로 관객들을 압도하고 주인공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는지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이 영화는 상황을 이용하여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관찰하는데 노력한다. 

영화는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유지한다. 긴장감이 극한으로 오르지는 않지만, 적절한 선에서 계속 유지된다. 이는 역시 상황에 기인한 것이 크다. 연출은 크게 욕심내지 않고 배우들과 상황에 극의 흐름을 맡겨둔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초반부에 긴장감이 한번 확 올라버린 후에 후반부에 뭘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좀 실망스러울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잘 조율되어 있다. 적절한 생략으로 잔인함에 대한 묘사도 잘 제어된다. 사실 대놓고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는 게 더 무섭기도 하다.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면, 어느날 세계가 멸망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식인까지 하며 생존 자체가 위협 받는 미국땅에서 한 부자가 남쪽으로 가는 그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게 되고 결국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부성애의 영화라고 말하기엔 너무 큰 화두를 던진다. 인간의 이타심과 자식에 대한 부성애의 충돌부터,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에 대한 애매한 구분점. 이런 사태의 원인이나 해결에 대한 노력보다 상황과 인간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인 것이다.

이 여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성장한다. 아버지는 아내의 사진이 든 지갑을 버리고, 결혼 반지를 빼서 놓고 떠남으로 과거와의 이별을 위해 노력하고,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각인시키려 노력한다.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이기심과 남을 도울수 있는 이타심이 서로 충돌을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에게서 이타심을 배우고 그 사이에서 두 가지를 조율시키려 애쓴다. 아이는 이타심으로 남들을 돕자고 주장하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충돌한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그가 한 말을 머리에 새기며 그 말을 따르고자 애쓰며 조금은 더 성장한다.

이 영화의 주연인 비고 모텐슨의 연기는 정말 좋다. 주름으로 연기가 되는 배우랄까.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후에 액션 영화에도 좀 나오고 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았던 영화는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였다. 이 영화에서의 연기도 정말 좋다. 영화의 엔딩 부분에서 누워서 눈물만 흘리는 연기를 보면,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저 슬픔을 얼굴에 주름살로, 눈물 한방울로 전달하는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아이의 연기도 좋다. 아버지의 에너지에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중심을 제대로 잘 잡는다. 로버트 듀발, 샤를리즈 테론도 조연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다.

이 영화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고자 하는 영화다.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 인육을 먹으면 나쁜 사람이고, 인육을 안 먹으면 착한 사람인가? 단순히 강도짓을 당했다고 강도를 찾아서 똑같이 갚아주는 건 잘한건가? 그럼 그 강도는 잘 한건가? 먹을게 없어서 인육을 먹기 시작한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 이기심과 이타심의 허용기준은 어디까지인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이렇게 하면 저들도 나에게 잘 해줄까? 이런 갖가지 의문들을 던지기만 하고 답은 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이 부자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와이프가 하라고 했으니까. 따뜻한 남쪽에는 먹을것도 풍부하리라는 단순한 이유로. 그렇다고 내려가는 것만이 이들의 목표인 걸까? 아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지금과는 다른 것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냥 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희망을 걸고 가는 길일뿐. 바로 그 길을 말이다.




Posted by 파라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