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ing you.../About Movies2008. 11. 24. 22:57
지난 해에 '눈먼 자들의 도시'와 '셀'을 비교한 적이 있었다. < http://strike96.tistory.com/21 >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다른 표현방법에 대해 분석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헐리웃에서는 영화 안 만들꺼라고 했는데, 그 예측이 틀려서(=_=) 영화가 나왔다.

< 눈먼 자들의 도시 >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화하기에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질병의 원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들이 무엇을 얻지도 못하고, 그들의 힘으로 뭔가 해결되지도 않고, 갑자기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던 문제는 해결되고 만다. 영화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를 아우르는 드라마적 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상황을 던져주고 거기에 따라 반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해보는 영화인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랄까? 그래서 영화는 많이 불편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멀게된 사람들을 수용소에 임시로 몰아넣기 시작한 것까진 좋았지만 도시 전체가 눈이 멀어버린 상황, 모든 사람들이 통제권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단 한명만이 눈이 보인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각자의 인간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그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이 과정의 묘사들과 행동방식들이 꽤나 불편하다. 사실적이고 노골적이며, 포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물질을 바라는 인간들이 물질이 더 이상 필요없어진 이후에 음식을 매개로 성을 착취하는 모습, 동물적 본능으로 냄새로 사람을 판단하고, 음식을 위해 사람이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이런 극한까지 치달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사회의 제도가 이런 상황에 대해 얼마나 대처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동시에 던진다.  ( 인간이 만든 사회시스템의 한계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눈뜬 자들의 도시 에서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의문을 던지기는 하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실명사태는 갑자기 처음의 발병자로부터 눈이 다시 보이면서 끝난다. 인간들의 노력으로 원인을 찾고 해결한 것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어쩔수 없는 문제인 것.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나서 영화는 하나의 희망을 제시하고 끝난다.

이런 내용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원작과의 비교를 좀 해본다면, 영화는 책을 충실히 옮기려고 노력한다. 원작에 묘사된 내용들을 비교적 충실히 옮기기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다. 우선, 인종과 언어의 차이가 없는 원작에 비해 영화는 제작사가 소속된 일본의 영향 때문인지 가장 처음 눈이 머는 사람을 일본인으로 설정을 해 버린 바람에 어쩔수 없는 선입견이 생기게 된다. 또, 피부색의 차이로 인한 선입견도 생길 수 밖에 없다. 3병동의 사람들은 라틴계가 많았던 것처럼. 그러다 보니 원작처럼 어디에나 있을법한 사회라기 보단 왠지 미국일 것 같은 느낌을 자꾸 가지게 되는 것.
좋았던 부분은 도시의 혼란상을 표현하며, 원작처럼 애꾸눈 노인이 말하는 장면들만 간접적 묘사를 해 줌으로 해서 인간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보다 사고의 끔찍함으로 촛점이 넘어가는 것을 잘 차단한 것이다. 만약에 비행기 사고등의 장면들을 자세하고 길게 묘사했다면, 실명사태가 벌이는 사고에 더 촛점이 맞아 버렸을 것이다. 그걸 잘 끊어낸 것이 아주 좋았다.

전반적으로 불편함으로 무장된 영화일 것이 뻔했지만, 그 불편함안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원작의 무게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잘 해냈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Posted by 파라미르
Telling you.../About Movies2008. 10. 2. 23:17

미국에서 10월 3일에 개봉한다고 한다. 칸에서는 오프닝 작품으로 이미 공개가 되었었고, 국내에서는 11월 개봉 예정이다.

( 그런데 미국 맹인 연합회에서는 이 영화에서 묘사된 맹인들의 행동(강간, 음식 약탈, 강도)들 때문에 시위를 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

공식 홈페이지도 잘 만들어져 있다. 예고편도 볼 수 있는데, 초반의 혼란 이미지를 잘 살리고 있는듯.
근데, 막상 영화화된 걸 보려다 보니 좀 그렇기도 하다. 상상만 하던 혼란에 빠진 도시가 눈앞에 나오는 걸 보니 원작을 보며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니 좀 실망이 되기도. ㅎㅎ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이 다루고 있는 주제를 얼마나 잘 표현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지.

공식 홈페이지 : http://www.blindness-themovie.com/

아래는 스틸 몇 장.








Posted by 파라미르

요즘 책 읽는데 재미가 붙었다. 워낙 책과는 담 쌓은지 오래되어 다시 재미가 붙으리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또 그 재미에서 쉽게 벗어나기가 쉽지 않더라. 이번엔 요즘 나에게 책을 주기적으로 제공해 주고 있는 이의 소개로 읽게 된 '눈먼 자들의 도시'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스티븐 킹의 최신작 '셀'을 비교해 보려 한다.

먼저 스티븐 킹의 '셀'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서 읽기 시작한 작품이다. 2006년에 출간되었고, 예의 스티븐 킹의 주력 분야인 호러 소설이다. 다만 이번엔 그 분야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핸드폰, Cell Phone 이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랄까?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주제 사라마구의 초기작으로 온 나라가 눈이 다 멀어버리는 상황을 다룬 소설이다. 논리적이거나 과학적 접근이 아닌 인간 군상에 대한 탐구가 주된 주제가 된다. 굳이 이 장르가 다른 두 책을 비교할 필요가 있겠느냐마는 순전히 나의 재미를 위한 비교이므로 뭐 따질것은 없으리라 본다. (쿨럭... )

이 두권의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개인과 사회라는 집단에 대한 것이다. 이 두권의 서로 다른 책은 흥미로운 가정에서 시작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책을 읽을 예정이신 분들은 삼가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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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이하 눈먼 자)와 '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국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며, 여기에 대한 대처 방법이다. 그리고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인간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든다.

눈먼자는 원인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극을 끌어간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등장인물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스스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런 다른 목적은 없다. 혼자만의 힘으로 살수 없는 이들의 삶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 요소가 되어 소설의 처음부터 끝을 지탱하는 하나의 큰 기둥으로 서 있는 것이다. 생존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가진 이들은 아주 강한 의지를 표출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살기 위해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 손을 잡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백색 실명상태에 빠진 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리 강한의지를 가진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절망과 공포를 이 소설은 잘 드러낸다.

셀에서는 문제의 원인이 다른 것처럼 눈먼 자에서의 표현 방식과는 차이를 가진다. 이 소설에서의 가장 강력한 모티브는 부성애다. 소설을 이끄는 주인공은 아들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협력해 난관을 헤쳐나간다.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의 원인을 탐구하며 그 해결책을 찾아 아들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소설가가 이 극의 처음부터 끝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서 기인하는 등장인물들의 대처방식과 사회의 변화상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소극적 대처와 적극적인 저항의 차이를 보여준다. 혼란의 원인이 다르기에 그에 대한 대처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겠으나 이 두권의 소설은 두 작가의 성향적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몇가지 차이점을 열거해 보자면, 먼저 문제의 발단이다. '셀'에서는 휴대폰을 사용중인 이들이 갑자기 돌변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서로 공격하며 사회가 혼란의 일로에 빠져든다. '눈먼 자들의 도시'(이하 눈먼 자)는 소수의 인간들이 눈이 멀기 시작하여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정리하자면 혼란의 시작지점이 다수에서 소수로냐, 소수에서 다수로의 확산이냐 하는 점이 두 소설의 차이이다.

두번째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인간들에게 이성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 셀에서의 인간들은 이성을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돌변하지만, 눈먼 자에서는 이성은 똑같이 존재하지만 눈이 안보인다는 핸디캡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셀에서는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점점 하나의 목적을 향해 사회를 이룩해 나가면서 그렇지 않은 정상인들이 오히려 위협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눈먼자에서는 종국에는 모두가 실명을 해 버리면서 차이를 완전히 없애 버린다. 그 상황에서 각자의 인간들이 반응하는 서로 다른방식을 작가는 표현한다.

셋째로, 문체와 화자의 선택에 있어서도 두 소설은 차이를 지닌다. 눈먼 자의 문체는 특이하다. 따옴표가 없는, 인물들 각자가 얘기하는 것이 아닌 소설 전체의 화자가 각 인물들의 대화를 대신 읽어주는 듯한 독특한 구술방법으로 읽는 이의 집중을 요구한다. 조금만 흐름을 놓치면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도 잊어버릴 정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셀은 스티븐 킹의 전형적 서술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전지적 작가 시점 (고등학교 작문 시간 이후에 이런 표현 쓰는 것은 실로 오랫만이다.) 에서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대변해 주기도 하고, 다른 지역의 상황을 전해주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두 소설 모두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큰 틀은 동일하지만, 눈먼 자의 서술 방식은 조금 더 심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발전시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상황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더해지기도 한다. 셀의 서술 방식은 조금 더 자극적이고 보는 이들의 시각화를 요구한다.

네번째, 또 다른 차이는 이름이라는 요소를 대하는 두 소설의 차이다.
눈먼 자에서는 모든 이에게 이름이 주어져 있지 않다. 가장 먼저 눈 먼 사람, 의사, 의사의 아내, 소년, 이런 식으로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신, 그 상황에서 적절히 주어진 이름이 부여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고 서술된다. 누구도 이름을 얘기하거나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이름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겐 목소리가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반면 셀은 이름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혼란의 가운데서 이름이라는 것은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정신이 온전하냐 그렇지 못하냐를 구분하는 매우 중요한 장치다. 누군가를 길에서 만나면 서로 이름을 밝히며 나는 멀쩡하다는 것을 알린 후에야 안심하는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물론 이 사건의 시초가 되는 대혼란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이긴 하다.)

다섯번째, 인간들이 구성하는 사회를 보는 시각의 차이다.
눈먼 자에서는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을 격리하여 그들만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 사이에서 리더가 생기고 외부적 강제요인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지만 나름대로의 룰이 생기고 규범이 생기면서 나름의 사회를 구축해 나간다. 그 사회 역시도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만든 다른 소사회들과의 충둘과 대립, 화합을 통해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며 꾸려나가진다. 외부적 강제요인을 부여한 이들마저 눈이 멀어버리고, 강제요인이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소사회를 깨고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하물며 본인이 눈멀기 전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 한번 구축된 사회의 구성원이 그 틀을 깨고 나오기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서술이라고 볼수 있다.

셀에서의 사회는 일대 대 혼란이후, 오히려 머리가 리셋되어버린 이들이 구축한 사회와 이들에게 의해 조종받는 정상인들의 대립으로 정리된다. 셀 바이러스(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의해 머리가 리셋되어 버린 이들은 오직 한가지 목적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리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정상인들을 토끼굴로 몰아가듯 압박한다. 마치 1984에서 조지 오웰이 얘기하려는 듯한 Big Brother 에 의해 통제되는 것 같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들이 구축한 목적없는 사회의 끝은 알수 없으나 그런 상황이 빚어내는 아이러니함은 인간 사회의 복잡함에 대한 역설적 접근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인공과 그 그룹을 이끌어가며 얘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도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눈먼 자에서는 의사와 의사의 아내,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 멀지 않는 유일한 인물과 그 그룹을 중심으로 모든 얘기를 풀어나간다. 여기서 의사의 아내는 모든 실명이 된 인물을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가 겪게되는 갈등들 역시도 사회와 개인이 충돌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흔히들 하는 말로 외눈박이 세상에선 두눈박이가 병신이라는 말처럼, 모두 보이지 않는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가지게 되는 갈등에 대한 표현과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의 조심스러움이 소설 전반에서 진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미 얘기했듯이 이 소설은 병의 원인과 그것을 극복해나가려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라 이들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며, 사회를 이루고 살아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셀에서의 주인공들은 정상인들이다. 평범한 소설작가와 그들이 혼란에서 처음만난 이들로 구성된 그룹이 여러 난관을 헤쳐가며 나름 이 증상의 원인을 밝혀내려는 전형적인 형태를 지닌다. 어찌본다면 헐리웃 영화를 위한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위한 소설이다. (이미 영화화가 진행중이며 2008년 개봉 예정이다.) 셀에서의 주인공 그룹은 끊임없이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이 주인공의 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기본적으로 이 현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눈먼 자의 실명증상은 극의 주인공들에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단 적응해야할 변화이다. 셀에서는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이 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질병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기에 셀에서의 주인공들은 투쟁적이다. 언제나 주위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며 한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눈먼 자들에서의 주인공 그룹은 협력과 한명의 눈이 보이는 이를 중심으로 뭉친 공동체를 이루어 똘똘 뭉쳐서 주어진 상황에서 적응하며 살아나간다.

하지만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주제의식이다. 눈먼 자는 그 혼란상에서 오는 공포가 주제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 닥친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변화해 가는 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변화와 인간에 대한 본성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면, 셀에서는 아들에 대한 애정으로 그 혼란한 세상을 헤쳐나가 결국 아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남자에게 집중한다. 앞에서의 혼란의 확산정도와 동일하게 눈먼 자는 작은 사건으로 시작해 전체를 보기 위해 노력한다면, 셀은 전체의 혼란함 가운데서도 한 남자의 부성애에 집중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권의 책은 재미있다. (만약 당신이 스티븐 킹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셀은 권하고 싶지 않다. 나중에 영화로 나오면 그때 보든지 말든지. 킹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건 그나마 '쇼생크 탈출'인 것 같다. )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당신이 소설 읽는 것을 즐긴다면 한번쯤 꼭 도전해 볼만한 책이다. 셀은 당신이 상상력이 풍부하고 좀비영화에 알러지가 없다는 전제하에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셀의 장면들을 여러 감독이 만든 버젼을 상상해 보면 재밌다. 타란티노, 피터 잭슨, 박찬욱, 스필버그등)

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책들에 대한 얘기인데, 생각이 이래저래 꼬여있다보니 말이 넘 두서없어졌다. 마지막으로 좋은 책을 추천해주신 사서분께 감사드린다.

P.S.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눈먼 자를 영화화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초반부엔 가져봤지만 곧 금방두고 말았다. 초반부의 대혼란과 군대와의 대치등의 다양한 시각화할수 있을만한 요소는 충분했으나 가장 큰 맹점은 갈등의 존재와 해소 방식이다. 눈먼 자는 증상의 원인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해소할 큰 갈등도 없다. 사람들은 그 증상을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간다. 그 증상을 해소하기 위해 누구도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극적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어렵다는 것이 나의 결론. 헐리웃에선 절대 안만들꺼다.




Posted by 파라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