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 하벨'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4.04 바츨라프 하벨의 - Leaving

연극은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극의 3원칙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이미 기원전부터 있어왔던 예술의 한 형태다. 기술이 발전하고 다양한 예술의 형태들이 발전하고 수많은 영상 매체들이 등장했지만, 연극은 여전히 무대 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다른 무대, 영상 예술들이 발전하는 기본적인 역할, 말하자면 기반이 되고 있다. 기본이 되는 전통적인 공연이 있는가 하면, 희곡의 발전과 무대장치의 발전, 연출의 발전으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것도 연극의 매력중의 하나다. Leaving 은 그 변주를 영리하게 이용하는 연극이다.



먼저, 이 연극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전직 총리인 빌렘 리에게르는 은퇴 후, 그의 가족과 오랜 동반자 이레나와 함께 벚나무로 둘러싸인 정부 소유의 관저에서 생활하고 있다. 퇴임 후에도 끊임없는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고 있는 그의 집에 어느 날 신문기자 딕이 방문하여 관저를 곧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리에게르에게 그의 후임자 클레인이 방문하여 현 정부를 지지해 줄 경우, 지금 살고 있는 빌라에서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한다.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리에게르에게 큰 딸 블라스타는 현 정부에 의해 언제든 재산이 압류, 몰수 될 수 있으니 전 재산을 다른 사람의 명의로 바꿔놓을 것을 주장한다. 한편, 젊은 여성 정치학도와 은밀한 관계를 맺던 리에게르는 이레나에게 발각이 되고, 그녀는 리에게르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이 때, 법원으로부터 관저를 떠나라는 ‘최후 통지서’가 날아오고, 전날 딕과 가진 인터뷰에서 리에게르가 열변을 토했던 다양한 정치 이슈들은 사라진 채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 원색적인 기사로 도배가 된 신문이 배달된다. 그제서야 자신이 가졌던 모든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고 었음을 느낀 리에게르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권력과 인생의 배반에 대하여 분노한다.

이 연극은 극 중간에서 작가가 스스로 밝히듯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권력을 잃고 가족에게 버림 받는 총리의 캐릭터는 리어왕에서 가져왔으며, 안톤 체홉의 '벚꽃 동산'에서 가문의 몰락과 권력의 상실을 모티브로 하여 극을 구성해 낸다.

이 연극은 전통적인 연극의 형태를 지니고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식과 연출을 이용해 그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공연은 평범하게 시작한다. 무대에는 여덟그루의 버찌나무들과 그 뒤에 10개 가까이 되는 문들, 그리고 중앙에 저택으로 통하는 철문을 두고, 마당에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다.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번에 무대로 등장해 무대를 가득 매운다. 잠시 후 모든 등장인물들은 문을 통해 퇴장하고, 총리와 그의 가족, 가신들만 남는다. 그리고 얘기가 시작된다. 

연극의 초반부는 상황을 보여주고, 인물들을 드러낸다. 이 연극에서 중요한 갈등은 인물간의 것이라기 보다는 권력을 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를 위해 이 연극은 1막에서 그를 무너뜨리기 위한 작업을 천천히 시작한다. 지금까지 잘 살고 있던 집을 정부에서 가져간다고 압박하기 시작하고, 그것도 그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 의해 듣게 된다. 잠시후 후임 총리가 와서 그를 압박하고, 측근들은 그를 떠날 것 같은 눈치를 보이고, 딸은 사위와 함께 와서 유언장을 작성하자고 꼬신다. 결국 그가 젊은 여성학도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게된 이레나는 그를 떠나고자 한다. 또, 그가 예전에 가졌던 여성 관계들이 담긴 개인적인 편지들이 불태워지지 않고 언론과 경찰에 넘어간다. 이 모든 것들이 한번에 일어나 그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결국 빌렘은 궁지에 몰리고 폭풍우가 부는 날 언덕에서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그리고는 경찰에 끌려간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빌렘은 결국 나락에 떨어지고 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는 일. 그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연극은 빌렘을 절망에 빠뜨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권력에서, 자신이 믿던 사람들에게서 버림 받게 된 빌렘의 감정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희곡을 쓴 하벨의 특이한 경력이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벨은 희곡 작가였으며,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니기도 한 사람이다. 그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의 첫 작품이 이 Leaving 이라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이 연극의 주인공과 대통령이기도 한 작가 자신을 동화시키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이 얘기가 더 진실성이 있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 연극은 형식적인 면에서 특이하기도 하다. 첫번째로 작가인 하벨의 나레이션이 수시로 극에 개입하여 극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 나레이션들이 관객의 마음을 읽는 부분도 있고, 동시에 희곡을 쓰는 작가의 괴로움을 털어놓을 때도 있고, 작가의 취향을 말할 경우도 있다. 이런 적극적인 개입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장점으로는 극의 의미에 대한 오독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고, 단점으로는 관객 스스로의 감정의 발전과 진행을 방해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두번째로는 무대와 음향의 적극적 활용이다. 1막에서의 정적인 무대에서는 무대는 완벽하게 단 한 곳으로 인식된다. 저택의 앞 마당이었지만, 2막에서의 무대는 다양한 변주가 이어진다. 폭풍우가 부는 언덕이 되기도 하고, 기적 소리가 울리는 기차역이 되기도 한다. 수시로 울리는 기적 소리와 함께 공연의 중간중간에 계속 나오는 모든 배우들이 시계를 보는 장면들은 결국 이 장면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빌렘이 결국 자신의 신념을 떠나고 그가 믿었던 것에서 떠나게 되는 그 장면. 극중간에 등장하는 전라의 남자가 뛰어다니는 장면은 빌렘의 신념이 그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수시로 등장하는 무대에서의 음악들도 연극의 극적 긴장감을 살려준다. 극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처리 되는 음악이 극의 흐름을 살리는데 일조한다.

결국 이 연극은 인간에 대한 관찰기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인간이 모든 것을 잃는 순간에 어떻게 변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연극의 제목인 leaving 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개인마다 느낌이 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이 연극은 떠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내가 권력으로부터 떠나는 것, 내가 믿는 사람들이 나로부터 떠나는 것, 떠난다는 것이 나에게 주는 상실감, 나를 떠나는 나의 신념, 과연 그런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Posted by 파라미르